나훈아 뉴스

구설수 많았던 나훈아, 어떻게 생명력 질긴 가수가 됐나

현대판 사민정책의 애환을 어루만진 나훈아의 '고향역'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김종성(qqqkim2000)
17.09.10 19:43최종업데이트17.09.10 19:43                
나훈아, '삼류소설의 주인공이 되버린' 지난 2008년 1월 25일 오전 홍은동 그랜드힐튼 호텔 그랜드볼룸에서 가수 나훈아가 괴소문 관련 기자회견을 열어 그간의 침묵을 깨고 이야기하고 있다.

가수 나훈아ⓒ 연합뉴스


가수 나훈아의 콘서트 예매가 불과 12분 만에 매진됐다는 소식이 화제가 됐다. 11월과 12월 서울·부산·대구에서 총 9차례 열릴 '나훈아 드림 콘서트' 예매가 지난 5일 오전 10시부터 예스24에서 진행됐다. 언론보도에 따르면, 약 30만 명이 예매 사이트에 몰리면서 총 3만 1500석이 순식간에 매진됐다. 서울 공연 예매는 7분, 대구 공연은 10분, 부산은 12분 걸렸다.

예매자의 51.5%가 30대라고 한다. 예스24 관계자는 언론 인터뷰에서 "SNS 반응을 살펴보면, 부모님께 선물하려고 예매하는 경우가 많은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주로 60, 70대가 실질적인 구매자인 셈이다. 그간 나훈아가 음악활동 이외의 사유로 구설수에 자주 휘말린 점을 생각하면, 참으로 생명력이 질긴 가수가 아닐 수 없다.

콘서트 순식간 예매... 나훈아 팬덤의 배경

나훈아가 저력 있는 가수가 된 데에는 물론 실력이 가장 크게 작용했겠지만, 데뷔 당시의 시대적 배경도 큰 몫을 했다. 1966년에 '천리길'이란 노래로 데뷔한 그는 60·70년대의 공업화 및 대도시 인구 유인책의 분위기를 음악적으로 담아냈다. 장유정·서병기의 <한국 대중음악사 개론> 제8장에서는 "도시화로 인해 농촌을 등진 서민들의 향수를 달래는 노래를 많이 불렀다"고 평가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대표적으로 나훈아는 '코스코스 피어 있는 정든 고향역/ 이쁜이 꽃뿐이 모두 나와 반겨주겠지/ 달려라 고향열차 설레는 가슴 안고/ 눈 감아도 떠오르는 그리운 나의 고향역'이라고 노래한 <고향역>에서 그런 감정을 대변했고 ······"

<인물과 사상> 2012년 12월호에 실린 김환표의 논문 '팬덤의 역사-인정투쟁을 위한 치열한 몸부림인가 (1)'에서도 "오로지 먹고살기 위해 정든 고향을 떠나 타지 생활을 해야 했던 이들의 애환을 달래"주었다는 점에서 나훈아 음악활동의 의의를 찾았다.

고향 떠난 사람들의 향수를 자극하는 나훈아의 방식은 1972년 임종수가 작사한 '고향역'뿐 아니라, 같은 해에 나온 김관현 작사의 '녹슬은 기찻길'에도 나타난다. 이 곡에서는 "고향 잃은 서러움을 녹슬은 기찻길아/ 어버이 정 그리워 우는 이 마음"이라고 노래했다. 농촌을 떠난 사람들의 애환을 달래주는 노래를 통해 나훈아의 팬덤이 구축됐고, 그것이 그의 저력 중 일부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고향역 분위기를 풍기는 월정리역. 왼쪽은 역사, 오른쪽은 역사 뒤편 철로. 강원도 철원군의 민통선 이북에 있다.

고향역 분위기를 풍기는 월정리역. 왼쪽은 역사, 오른쪽은 역사 뒤편 철로. 강원도 철원군의 민통선 이북에 있다.ⓒ 김종성


나훈아의 음악적 성공을 도운 공업화 및 대도시 인구 유인책이라는 시대적 배경을 역사학 용어로 표현하면 '현대판 사민(徙民)정책'으로 바꿀 수 있다. 국가의 정책적 필요에 따라 백성을 다른 지방으로 이주시키는 이 정책은 고대 왕국뿐만 아니라 가까운 조선왕조까지도 있었다.

일례로, <삼국사기> 신라본기에서는 782년에 선덕왕(선덕여왕×)이 한 일을 두고 "왕이 한산주를 순행한 뒤 민간 가구들을 패강진으로 옮겼다"고 말했다. 한산주는 지금의 경기도 광주를 중심으로 하는 지역이고, 패강진은 지금의 황해북도에 있었던 지역이다. 경기도 광주 쪽 백성들이 국가정책에 따라 황해도 쪽으로 이주했던 것이다.

그런 일은 수시로 일어났다. 우리가 잘 아는 조선 세종시대에도 있었다. 세종은 4군 6진 개척으로 넓어진 영토에 남쪽 농민들을 이주시켰다.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개인은 거주·이전의 자유가 없었다. 국가가 거주·이전을 결정했기에 사민정책이 별 저항 없이 집행될 수 있었다.

그렇게 고향을 떠나 객지로 가는 사람들은 당연히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낯선 곳에 정착한 뒤에도 고향을 그리워하며, 향수를 달랠 만한 곡조를 흥얼거렸을 것이다.

하지만, 사민정책이 백성들에게 고통만 준 것은 아니다. 국가는 농업 노동력이 필요한 곳으로 백성들을 수시로 이주시켰다. 유휴 농지가 있거나 황무지가 있는 곳으로 백성들을 사민시켰다. 그래서 국가가 가라는 대로 가면, 원칙적으로 일자리만큼은 보장받을 수 있었다. 그렇게 국가가 생활터전과 일거리를 제공하는 대신, 백성은 납세와 군역의 의무를 부담했다.

그랬기 때문에 특별한 변수가 없는 한, 사민정책을 따르면 최소한의 생계는 유지할 수 있었다. 새로 정착한 땅에서 더 이상의 수확을 기대할 수 없다면, 국가는 또 다른 곳으로 백성들을 사민시켰다. 고대 국가가 몇 년이 멀다 하고 전쟁을 벌인 것은 그런 토지를 획득하기 위해서였다. 이렇게 국가가 일자리를 보장했기 때문에, 백성들은 고향 떠나는 아픔을 그럭저럭 달랠 수 있었다.

현대 국가에서도 사민정책은 여전히 필요하다. 특정 지역으로 국민들이 이주하는 게 국가정책상 이로울 때가 있다. 하지만, 거주·이전의 자유가 있으므로 옛날처럼 강제로 이주시킬 수는 없다. 그래서 현대 국가가 구사하는 방법은, 경제적·사회적 정책을 통해 국민들을 특정 지역으로 유인하는 것이다.

서울 등 대도시를 기반으로 공업화 정책을 추진한 60·70년대 한국 정부도 그랬다. 각종 유인책을 써서 국민들을 대도시, 특히 서울로 '사민'시켰다. 비공식적인 사민정책, 현대판 사민정책을 구사한 것이다.

 
 마산수출공단. 서울시 마포구 상암동의 박정희대통령기념도서관에서 찍은 사진.

마산수출공단. 서울시 마포구 상암동의 박정희대통령기념도서관에서 찍은 사진.ⓒ 김종성


유인책은 다른 게 아니었다. 왕조시대나 지금이나 사민정책의 본질은 같다. 일자리로 유인하는 것이다. 왕조시대에는 '저곳에 일자리가 있으니 저기로 떠나라'고 명령했다면, 오늘날에는 '저곳에다가 일자리를 늘릴 것이다'라고 유혹한다는 점에서 다를 뿐이다. 60·70년대 한국 정부는 대규모 공업단지를 서울 등 대도시에 집중시키는 한편, 농촌 개발에 대한 지원을 줄임으로써 농촌 주민들이 고향을 떠날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다.

나훈아가 '고향역'을 발표한 1972년 대한지방행정공제회가 발행한 <도시문제>에 실린 이태우의 논문 '서울에의 인구집중 원인과 대책'에서는, 서울시 인구증가의 최대 요인은 도시 및 공업 중심의 경제정책에 있다고 지적했다. 정부가 농촌개발에 돈을 적게 쓰고 도시와의 소득격차를 방조한 것이 서울의 인구증가로 이어졌다고 논문은 지적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10대 중반 이상의 농촌 청년들이 공장 노동자가 되고자 대도시 변두리로 몰려들었다. 서울에서 공장 노동자가 아닌 버스 안내양으로 생활하던 농촌 출신 여성들의 경우에는, 버스 운전석 옆에 요금통이 생기면서부터 구로공단 같은 곳으로 대거 유입되기도 했다. 정부의 버스 요금통 설치 정책이 그들을 공장으로 유인했던 것이다.

대도시 특히 서울로 노동자를 유인하는 정책으로 인해 서울 인구는 단기간에 급증했다. 1959년에 2백만을 넘은 서울 인구는 나훈아가 가수로 데뷔한 지 2년 뒤인 1968년에는 4백만으로 증가했다. '고향역'을 발표한 1972년에는 6백만이었다. 서울시에서 도시계획국장 등을 역임하고 서울시립대에서 대학원장을 지내고 서울시 시사편찬위원장으로 일한 손정목의 <서울 도시계획 이야기 1>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이러한 인구증가는 이 지구상에서 통계가 제대로 잡힌 이후로 전무후무한, 실로 특례 중의 특례였다. 문자 그대로 '광적인 집중'이었다. 1966~1980년의 15년 동안 서울에는 정확히 489만 3499명의 인구가 늘었다. 15년 동안 하루 평균 894명의 인구가 새롭게 늘었다는 계산이다.

토요일도 일요일도 없이 매일 894명씩 인구가 늘면 매일 224동의 주택을 새로 지어야 하고, 50명씩 타는 버스가 18대씩 늘어나야 하고, 매일 268톤의 수돗물이 더 생산 공급되어야 하고, 매일 1340킬로그램의 쓰레기가 더 증가한다는 계산이 나온다."

고향 떠난 서민들의 애환을 노래하다

이렇게 농촌에서 대도시로 인구가 이동하면서, 고향에 대한 도시 서민들의 그리움이 깊어지던 시점에 나훈아가 '고향역'을 불렀다. '고향역'은 중노동과 박봉에 시달리며 하루하루 근근이 살아가는 도시 노동자들한테 '추석 명절 같은 때 고향에 내려가면 코스모스 피어 있는 정든 고향역을 볼 수 있고, 이쁜이·꽃뿐이가 반겨줄 것'이라는 메시지로 위로했다. "눈 감아도 떠오르는 그리운 나의 고향역"이란 가사로 마음을 뭉클하게 해주었다. 

이때 이 노래를 들으며 도시 생활의 애환을 달랜 농촌 출신 청년들이 지금은 60·70대가 되어 있다. 지난 5일 예매 사이트에 밀려든 30~39세 세대를 자녀로 둔 분들이다. 이들이 나훈아의 팬덤을 형성했고, 이것이 나훈아의 저력을 만들어준 요인 중 하나다. 현대판 사민정책이 가수 나훈아를 만들어준 셈이다.  

 
 봉제공장 노동자들. 박정희대통령기념도서관에서 찍은 사진.

봉제공장 노동자들. 박정희대통령기념도서관에서 찍은 사진.ⓒ 김종성


그런데 '고향역' 같은 노래로 향수를 달래며 이 나라의 공업화에 기여한 농촌 출신 대도시 서민들이 지금은 서서히 대도시 밖으로 밀려나고 있다. 서울 같은 대도시에서 기반을 잡고 내 집을 장만한 이들도 적지 않지만, 상당수는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근교나 농촌으로 밀려나고 있다. 대도시에서 근근이 버티고 있다 해도, 주택임대 보증금 때문에 언제 대도시 밖으로 밀려날지 알 수 없다.

왕조시대의 사민정책으로 고향을 떠난 사람들은 특별한 변수가 없는 한 최소한의 생계는 보장받을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의 국가는 농촌 주민들을 대도시로 유인해놓고는 그들에게 별다른 책임을 지지 않고 있다. 버틸 수 있으면 버텨보고, 버티기 힘들면 알아서 하라는 방임적 태도를 보이고 있다. 'A/S 정신'이 부족한 것이다. 그래서 농촌 출신 도시 서민들은 왕조시대 백성들에 비해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훨씬 더 많이 느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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